카를로 알베르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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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카를로 알베르토는 사보이아 왕가의 일원으로, 1798년 토리노에서 태어났다. 나폴레옹 시대와 부르봉 왕가 복고 시기를 거치며 자유주의 사상을 접했고, 1821년 혁명에 연루되어 섭정으로 스페인 헌법을 부여했으나, 이후 반동 정치 시기를 겪었다. 1831년 왕위에 오른 후 개혁을 추진했지만, 오스트리아와의 관계 악화와 '청년 이탈리아' 탄압 등으로 국내외적으로 고립되었다. 1848년 자유주의 헌장을 제정하고 제1차 이탈리아 독립 전쟁을 이끌었으나, 노바라 전투에서 패배한 후 퇴위하여 포르투갈로 망명, 그해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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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를로 알베르토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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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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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호 | 사르데냐 국왕 사보이아 공작 |
재위 기간 | 1831년 4월 27일 ~ 1849년 3월 23일 |
대관식 | 1831년 4월 27일 |
전체 이름 | 카를로 알베르토 에마누엘레 비토리오 마리아 클레멘테 사베리오 디 사보이아 |
이전 통치자 | 카를로 펠리체 |
다음 통치자 |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 |
출생일 | 1798년 10월 2일 |
출생 장소 | 토리노, 카리냐노 궁전 |
사망일 | 1849년 7월 28일 |
사망 장소 | 포르투, 포르투갈 왕국 |
매장일 | 1849년 10월 14일 |
매장 장소 | 토리노, 수페르가 대성당 |
배우자 | 마리아 테레지아 다 오스트리아(1817년 결혼) |
자녀 |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 페르디난도 디 사보이아 제노바 공작 마리아 크리스티나 공주 |
왕가 | 사보이아-카리냐노 가문 |
아버지 | 카를로 에마누엘레 디 사보이아 |
어머니 | 마리아 크리스티나 디 사소니아 |
종교 | 가톨릭교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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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치 | |
총리 목록 | 체사레 발보 가브리오 카사티 체사레 알피에리 디 소스테뇨 에토레 페로네 디 산 마르티노 빈첸초 조베르티 아고스티노 키오도 |
2. 초기 생애와 교육
카를로 알베르토는 1798년 10월 2일 토리노의 카리냐노 궁전에서 카리냐노 공 카를로 에마누엘레와 마리아 크리스티나 사이에서 태어났다.[2] 그의 아버지는 사보이아 공작 카를로 에마누엘레 1세의 적장자 중 막내인 카리냐노 공 토마스 프란체스코의 증손자이자, 사보이아 가문의 분가인 사보이아-카리냐노 가문의 시조였다. 당시 사보이아 왕가는 본가였기에, 카를로 알베르토는 왕위 계승 가능성은 희박했다.
당시 왕 카를로 에마누엘레 4세에게는 자녀가 없었고, 왕위는 그의 형인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1세에게, 그다음 그의 아들 카를로 에마누엘에게 돌아갈 예정이었다. 그 후 계승 순위에는 카를로 에마누엘레 4세의 두 형제인 마우리치오 주세페와 카를로 펠리체가 있었다. 그러나 1799년 이들 상속인 중 카를로 에마누엘(당시 3세)과 마우리치오 주세페(사르데냐에서 말라리아로 사망)가 사망하면서[1] 카를로 알베르토는 유력한 왕위 계승 후보가 되었다.
사보이아 공 비토리오 아메데오 1세의 동생 톰마소 프란체스코로부터 시작된 사보이아 가문의 분가 사보이아-카리냐노 가문의 7대손인 그는, 살리카 법을 채택한 사보이아 가문의 계승법에 따라 사르데냐 왕이 될 수 있었다.
2. 1. 나폴레옹 시대
카를로 알베르토의 아버지 카리냥의 카를로 에마누엘레는 프랑스에서 유학하고 프랑스군 장교를 지냈다. 자유주의에 동조적인 그는 1796년 프랑스 침공 이후 카를로 에마누엘레 4세가 망명한 직후인 1796년 토리노로 갔다. 카리냥의 카를로 에마누엘레와 그의 아내는 프랑스 편에 가담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부는 파리로 보내져 감시를 받았고, 교외의 집에서 빈곤한 환경 속에 살도록 강요받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그들의 자녀인 카를로 알베르토와 그의 누이 마리아 엘리사베타(엘리자베타 공주)(1800년 4월 13일 출생)가 자랐다.[3]1800년 8월 16일, 카리냥의 카를로 에마누엘레가 갑자기 사망했다. 그의 권리, 칭호, 재산을 인정할 의향이 전혀 없었던 프랑스인들과 대처하는 것은 카를로 알베르토의 어머니의 몫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아들을 보수적인 교육을 위해 사르데냐섬의 사보이 가문에게 보내는 것을 거부했다. 1808년 마리아 크리스티나가 조세페 마시밀리아노 티보 드 몽틀레르와 두 번째 결혼을 했는데, 그는 카를로 알베르토와 사이가 좋지 않았다.
열두 살이었을 때, 카를로 알베르토와 그의 어머니는 마침내 나폴레옹을 알현했고, 나폴레옹은 그에게 백작 작위와 연금을 수여했다. 더 이상 집에서 교육받는 것이 적절하지 않다고 판단되어, 카를로 알베르토는 1812년 파리의 콜레주 스타니슬라스에 입학했다. 그는 2년 동안 학교에 다녔지만, 규칙적으로 출석하지는 않았고, 시험을 치르기 위해서만 출석했는데, 결과는 성공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 사이 알베르티나는 제네바로 이주했고, 카를로 알베르토는 1812년 3월부터 1813년 12월까지 어머니와 함께 지냈다. 그리고 그녀는 장 자크 루소의 추종자인 장-피에르 에티엔느 보셰(1763-1841)라는 프로테스탄트 목사와 결혼했다.[4][5]
1813년 10월 라이프치히 전투에서 나폴레옹이 패배한 후, 오스트리아군의 도착을 두려워한 가족은 제네바를 떠나 프랑스로 돌아왔다. 1814년 초, 카를로 알베르토는 프랑스군 장교가 되기를 희망하며 부르주의 육군 사관학교에 입학했다. 그는 열여섯 살이었다.[6] 나폴레옹은 그를 1814년 기병 중위로 임명했다.
2. 2. 토리노에서의 첫 시기 (1814-1821)
카를로 알베르토의 아버지 카리냥의 카를로 에마누엘레는 프랑스에서 유학했고 프랑스군 장교였다. 자유주의에 동조한 그는 1796년 프랑스 침공 이후 카를로 에마누엘레 4세가 망명하자 1796년 토리노로 갔다. 카리냥의 카를로 에마누엘레와 그의 아내는 프랑스 편에 섰다. 그럼에도 부부는 파리로 보내져 감시를 받았고, 교외의 집에서 빈곤하게 살았다. 이런 상황에서 카를로 알베르토와 그의 누이 마리아 엘리사베타(엘리자베타 공주)(1800년 4월 13일 출생)가 자랐다.[3]1800년 8월 16일, 카리냥의 카를로 에마누엘레가 갑자기 사망했다. 그의 권리, 칭호, 재산을 인정할 의향이 없었던 프랑스인들과 대처하는 것은 카를로 알베르토 어머니의 몫이었다. 그럼에도 그녀는 아들을 보수 교육을 위해 사르데냐섬의 사보이 가문에게 보내는 것을 거부했다. 1808년 마리아 크리스티나는 조세페 마시밀리아노 티보 드 몽틀레르와 재혼했는데, 그는 카를로 알베르토와 사이가 좋지 않았다.
열두 살 때, 카를로 알베르토와 그의 어머니는 나폴레옹을 알현했고, 나폴레옹은 그에게 백작 작위와 연금을 주었다. 집에서 교육받는 것이 적절하지 않다고 판단되어, 카를로 알베르토는 1812년 파리의 콜레주 스타니슬라스에 입학했다. 그는 2년 동안 학교에 다녔지만, 규칙적으로 출석하지는 않았고, 시험을 보기 위해서만 출석했는데, 결과는 좋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 사이 알베르티나는 제네바로 이주했고, 카를로 알베르토는 1812년 3월부터 1813년 12월까지 어머니와 함께 지냈다. 그리고 그녀는 장 자크 루소의 추종자인 장-피에르 에티엔느 보셰(1763-1841)라는 프로테스탄트 목사와 결혼했다.[4][5]
1813년 10월 라이프치히 전투에서 나폴레옹이 패배한 후, 오스트리아군의 도착을 두려워한 가족은 제네바를 떠나 프랑스로 돌아왔다. 1814년 초, 카를로 알베르토는 프랑스군 장교가 되기를 바라며 부르주의 육군 사관학교에 입학했다. 그는 열여섯 살이었다.[6] 나폴레옹은 그를 1814년 기병 중위로 임명했다.

나폴레옹이 패배한 후, 새 국왕인 루이 18세는 1814년 5월 16일 파리에서 부르봉 왕가의 복고를 기념했다. 축하 행사에 참석한 사람들 중에는 카리냐노 공녀 마리아 크리스티나와 그녀의 자녀인 카를로 알베르토와 엘리사베타가 있었다. 과거에도 불구하고, 가족은 잘 대접받았지만, 카를로 알베르토는 부르주 군사학교에서 받았던 제국 백작 작위와 나폴레옹이 주었던 연금을 포기해야 했다.[7]
유럽의 평화 재정착은 카를로 알베르토가 토리노로 돌아갈 수 있음을 의미했고, 그는 가정교사인 알레산드로 디 살루초 디 메누시글리오 백작과 알베르티나의 조언을 받아들였다. 그는 파리(와 그의 계부)를 떠나 5월 24일 토리노에 도착했다. 거기서 그는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4세(카를로 에마누엘레 4세는 1802년 퇴위) 국왕과 그의 아내이자 합스부르크 대공녀 출신인 마리아 테레사 왕비 사르데냐 왕비 마리아 테레사로부터 따뜻한 환영을 받았다. 그의 재산과 토지는 그에게 돌아왔고, 그는 거주지로 카리냐노 궁전을 받았다.[8] 당시 왕조 상황(비토리오 에마누엘레와 그의 형제 카를로 펠리체 모두 아들이 없었음)[9]을 고려할 때, 카를로 알베르토는 왕위 계승자였다.
그는 프랑스에서 배운 자유주의 사상에 대항하기 위해 멘토를 배정받았다. 첫 번째 멘토는 필리포 그리말디 델 포제토 백작이었고, 그가 실패한 후에는 드라군인 폴리카르포 카케라노 다소스코가 멘토가 되었다. 그는 그 임무에 더 적합했지만, 이때 불안감에 시달리기 시작한 카를로 알베르토의 사고방식에 영향을 미칠 수는 없었다.[10]
3. 결혼과 성격
궁정에서는 결혼이 왕자에게 내적 안정을 가져다줄 것이라고 판단했다. 카를로 알베르토가 받아들인 신부는 토스카나 대공국 페르디난도 3세(Ferdinand III, Grand Duke of Tuscany)의 16세 딸이자, 마리아 테레지아 여왕의 친척인 마리아 테레지아 대공비(Archduchess Maria Theresa (1801–1855))였다. 1817년 3월 18일 카를로 알베르토는 토스카나 대공국을 거쳐 로마로 여행을 떠났고, 6개월의 약혼 기간 후 9월 30일 피렌체 대성당에서 마리아 테레지아와 결혼했다.[11] 결혼식 후에는 피렌체에 있는 사르데냐 대사관이 주최한 무도회가 열렸다. 10월 6일, 두 사람은 피에몬테로 떠났고, 10월 11일 발렌티노 성에 도착하여 토리노로 공식 입성했다.[12]
마리아 테레지아는 수줍고 종교적인 성격으로, 카를로 알베르토의 기질과는 상당히 달랐다. 두 사람은 카리냐노 궁전에 거주했는데, 카를로 알베르토는 자유주의적 사상을 공유하는 젊은 지식인들을 초대했다. 이들 중 가장 친밀한 사람들은 산토레 디 로시(Annibale Santorre di Rossi de Pomarolo, Count of Santarosa), 로베르토 다첼리오(Roberto d'Azeglio), 지아친토 콜레뇨(Giacinto Collegno), 체사레 발보(Cesare Balbo), 굴리엘모 모파 디 리시오 그리발디, 카를로 에마누엘레 아시나리 디 산 마르차노였다.[13]
카를로 알베르토는 이 시기에 심각한 종교적 위기를 겪기도 했다. 이는 프랑스 외교관 장 루이 드 두에 다제르와의 우정과, 수도원에 은퇴한 전 국왕 카를로 에마누엘레 4세를 방문하기 위해 1817년 로마를 방문한 결과였다. 그러나 결혼 후 몇 년 동안 카를로 알베르토는 베리 공작(Charles Ferdinand, Duke of Berry)의 미망인 마리 카롤린 드 부르봉(Marie-Caroline de Bourbon-Sicile, duchesse de Berry)을 포함한 여러 여성들과 사생활을 즐겼다.[14] 마리아 테레지아는 두 번의 유산을 겪었는데, 두 번째 유산은 1819년 마차 사고 때문이었다. 1820년 3월 14일, 그녀는 미래의 이탈리아 국왕인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Victor Emmanuel II)를 낳았다.[15]
4. 1821년 혁명 참여와 섭정
카를로 알베르토는 1821년 혁명에 참여하여 섭정까지 맡았으나, 혁명은 실패로 끝났다. 그는 사보이아 가문의 방계인 사보이아-카리냐노 가문 출신으로, 아버지 카를로 에마누엘레와 어머니 마리아 크리스티나 사이에서 태어났다. 당시에는 왕위 계승 가능성이 낮았으나, 비토리오 아메데오 3세의 아들들과 카를로 에마누엘레 4세,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1세, 카를로 펠리체 형제에게 모두 남자 후계자가 없어 살리카 법에 따라 왕위 계승권을 얻게 되었다.
4. 1. 1821년 혁명 참여
1820년 카디스 봉기 이후, 스페인의 페르디난드 7세 국왕은 1812년 스페인 헌법을 승인해야 했다. 유사한 헌법을 얻고자 하는 희망은 많은 유럽 국가들에서 생겨났다. 나폴리와 팔레르모에서 폭동이 일어났다. 1821년 3월 6일, 산토레 디 로시 데 포마롤로, 지아친토 콜레뇨, 카를로 디 산 마르자노, 그리고 굴리엘모 모파 디 리시오(모두 군 장교, 관리, 또는 장관의 아들들이었음)와 로베르토 다제글리오가 카를로 알베르토를 만났다. 젊은 자유주의자들은 행동할 준비가 되어 있었고, 사보이아 왕가를 위한 새로운 유형의 인물, 즉 절대주의 과거와 단절할 준비가 된 인물로 왕자를 지목했다.[16]음모자들은 사보이아 왕가를 폐지하려는 욕망이 없었고, 오히려 개혁을 통해 국민의 감사를 얻을 수 있기를 바랐다고 주장했다. 준비 기간 동안 카를로 알베르토는 그들에게 지지 의사를 보였고, 3월 6일에는 무력 행동을 지지한다고 선언하며 이를 확인했다. 그들은 군대를 모아 빅토르 에마누엘 1세 국왕의 거주지인 몬칼리에리를 포위하고 헌법을 승인하고 오스트리아에 선전포고할 것을 요구할 예정이었다. 카를로 알베르토는 음모자들과 국왕 사이에서 중재자 역할을 할 예정이었다.[17]
다음 날 아침인 3월 7일, 카를로 알베르토는 마음을 바꿔 음모자들에게 이를 알렸다. 그는 실제로 전쟁 장관 알레산드로 디 살루초 디 메누시글리오를 소환하여 혁명 음모를 발견했다고 말했다. 음모를 저지하려는 시도가 있었지만, 다음 날 디 로시와 디 마르자노가 다시 방문하면서 음모는 더욱 대담해졌다. 그러나 그들은 불확실해져 3월 10일에 일어날 예정이었던 봉기를 취소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같은 날, 후회로 가득 찬 카를로 알베르토는 몬칼리에리로 달려가 빅토르 에마누엘 1세에게 모든 것을 밝히고 용서를 구했다. 상황은 기점에 도달했다. 그날 밤, 음모자 중 한 명(굴리엘모 안살디)이 지휘하는 알레산드리아의 수비대가 일어나 도시를 장악했다. 이 시점에서 혁명가들은 왕자의 버림에도 불구하고 행동하기로 결정했다.[18]


1821년 3월 11일,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1세는 왕관 평의회 회의를 소집했는데, 카를로 알베르토도 참석했다. 참석자 대다수와 마찬가지로 카를로 알베르토는 헌법 부여 의사를 밝혔다. 그러나 오스트리아와 러시아 연합군이 이탈리아의 질서 회복을 위한 무력 개입을 임박했다는 소문이 퍼졌다. 따라서 국왕은 기다리기로 결정했지만, 다음 날 토리노 요새는 반란군의 손에 떨어졌다.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1세는 카를로 알베르토와 체사레 발보에게 카르보나리와 협상할 것을 요청했지만, 후자는 두 사람과의 접촉을 거부했다. 그날 저녁, 무장 봉기가 확산되자 국왕은 자신의 동생 카를로 펠리체에게 퇴위했다. 후자가 당시 모데나에 있었기 때문에 카를로 알베르토가 섭정으로 임명되었다.[19]
겨우 23세였던 카를로 알베르토는 자신이 야기한 심각한 정치 위기를 해결해야 할 책임을 지게 되었다. 구 내각은 그를 버렸고, 그는 새로운 정부를 임명해야 했다. 변호사 페르디난도 달 포초를 내무부 장관으로, 장군 에마누엘레 페스 디 빌라마리나를 전쟁부 장관으로, 로도비코 사울리 딜리아노를 외무부 장관으로 임명했다. 그는 반군과 협상하려 했지만 결과는 없었다. 공포에 질린 그는 새 국왕의 동의 없이는 어떤 결정도 내릴 수 없다고 주장하며, 카를로 펠리체에게 발생한 사건에 대한 보고와 지시 요청을 담은 편지를 보냈다. 그러나 그는 계속 지연하면 민중의 분노의 대상이 될까 두려워하여 1821년 3월 13일, 국왕의 승인을 조건으로 스페인 헌법을 부여한다는 선언을 발표했다.[20]
3월 14일, 섭정은 의회의 수호자 역할을 할 수 있는 준타를 구성하기로 결정했다. 수장은 토리노 대교구의 사제 총대리였던 얀세니즘 신봉자 피에르 베르나르도 마렌티니 추기경이었는데, 그는 1813년 피아첸차 주교로 선출되었지만 교황에 의해 거부당했다. 카를로 알베르토는 전날 임명한 전쟁부 장관을 무장 봉기의 지도자였던 산토레 디 로시로 교체했다. 3월 15일, 준타의 참석하에 카를로 알베르토는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1세의 왕비 마리아 테레사가 요청한 몇몇 조항이 수정된 스페인 헌법을 준수할 것을 선서했다.[21]
한편, 롬바르디아 자유주의자 대표들이 도착했다. 조르조 팔라비치노 트리불치오, 가에타노 데 카스틸리아, 주세페 아르코나티 비스콘티 등이었다. 그들은 밀라노를 해방하기 위해 오스트리아에 선전포고할 것을 카를로 알베르토에게 요구했지만, 왕자는 거절했다. 대신 그는 체사레 발보의 조언을 받아들여 무장 세력의 규율을 회복하고 과도한 행위를 중단시켰으며 국왕에게 충성하는 군대를 확고히 했다. 그러나 카를로 펠리체 자신은 자신의 동생의 퇴위 소식에 매우 불쾌하게 반응하여 "끔찍한 폭력 행위"라고 여기고 모데나에서 카를로 알베르토에게 노바라로 올 것을 명령하고, 동생의 퇴위 후 국왕의 이름으로 이루어진 모든 행위, 스페인 헌법의 부여를 포함하여 무효라고 선언했다.[22]

1821년 3월 21일 자정, 카를로 알베르토는 카리냐노 궁전(Palazzo Carignano)을 비밀리에 떠났다. 그의 출발은 다음 날까지 혁명가들에게 발각되지 않았다. 3월 23일 론디소네(Rondissone)에서 그는 산 제르마노 키소네(San Germano Chisone)로 향했고, 거기서 왕에게 충성을 지킨 노바라로 가려고 했다. 그는 6일 동안 노바라에 머물렀는데, 29일에 카를로 펠리체로부터 토스카나로 즉시 출발하라는 명령이 담긴 공문이 도착했다.[23]
4. 2. 섭정과 스페인 헌법
1821년 3월 11일,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1세는 왕관 평의회 회의를 소집했고, 카를로 알베르토도 참석했다. 대다수 참석자와 마찬가지로 카를로 알베르토는 헌법 부여에 찬성했다. 그러나 오스트리아와 러시아 연합군이 이탈리아 질서 회복을 위해 무력 개입을 할 것이라는 소문이 퍼졌다. 국왕은 기다리기로 결정했지만, 다음 날 토리노 요새는 반란군의 손에 함락되었다.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1세는 카를로 알베르토와 체사레 발보에게 카르보나리와 협상할 것을 요청했지만, 발보는 이들과의 접촉을 거부했다. 그날 저녁, 무장 봉기가 확산되자 국왕은 동생 카를로 펠리체에게 퇴위했다. 카를로 펠리체가 당시 모데나에 있었기 때문에 카를로 알베르토가 섭정으로 임명되었다.[19]겨우 23세였던 카를로 알베르토는 자신이 야기한 심각한 정치적 위기를 해결해야 했다. 구 내각은 그를 버렸고, 그는 새 정부를 임명해야 했다. 변호사 페르디난도 달 포초를 내무부 장관으로, 장군 Emanuele Pes di Villamarina|에마누엘레 페스 디 빌라마리나it를 전쟁부 장관으로, Lodovico Sauli d'Igliano|로도비코 사울리 딜리아노it를 외무부 장관으로 임명했다. 그는 반군과 협상하려 했지만 실패했다. 공포에 질린 그는 새 국왕의 동의 없이는 어떤 결정도 내릴 수 없다고 주장하며, 카를로 펠리체에게 발생한 사건에 대한 보고와 지시를 요청하는 편지를 보냈다. 그러나 계속 지연하면 민중의 분노를 살 수 있다고 두려워하여 1821년 3월 13일, 국왕의 승인을 조건으로 스페인 헌법을 부여한다는 선언을 발표했다.[20]
3월 14일, 섭정은 의회를 수호할 준타를 구성하기로 결정했다. 수장은 토리노 대교구의 사제 총대리였던 얀세니즘 신봉자 피에르 베르나르도 마렌티니 추기경이었는데, 그는 1813년 피아첸차 주교로 선출되었지만 교황에게 거부당했다. 카를로 알베르토는 전날 임명한 전쟁부 장관을 무장 봉기의 지도자였던 산토레 디 로시로 교체했다. 3월 15일, 준타의 참석하에 카를로 알베르토는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1세의 왕비 마리아 테레사가 요청한 몇몇 조항이 수정된 스페인 헌법을 준수할 것을 선서했다.[21]
한편, 롬바르디아 자유주의자 대표들이 도착했다. 조르조 팔라비치노 트리불치오, Gaetano Castiglia|가에타노 데 카스틸리아it, Giuseppe Arconati Visconti|주세페 아르코나티 비스콘티it 등이었다. 그들은 밀라노를 해방하기 위해 오스트리아에 선전포고할 것을 카를로 알베르토에게 요구했지만, 왕자는 거절했다. 대신 그는 체사레 발보의 조언을 받아들여 무장 세력의 규율을 회복하고 과도한 행위를 중단시켰으며 국왕에게 충성하는 군대를 확고히 했다. 그러나 카를로 펠리체 자신은 동생의 퇴위 소식에 매우 불쾌하게 반응하여 "끔찍한 폭력 행위"라고 여기고 모데나에서 카를로 알베르토에게 노바라로 올 것을 명령하고, 동생의 퇴위 후 국왕의 이름으로 이루어진 모든 행위, 스페인 헌법의 부여를 포함하여 무효라고 선언했다.[22]
5. 반동정치 시기 (1821-1831)
1823년 초, 앙굴렘 공작 루이 앙투안은 유럽 열강이 스페인의 자유주의 혁명을 진압하고 페르난도 7세를 스페인 왕위에 복귀시키는 임무를 맡은 프랑스 원정군의 지휘를 맡았다. 카를로 알베르토는 자신의 회개를 보여주고자 원정군에 참여하려 했다. 1823년 2월 20일 샤를 펠릭스에게 처음으로 이 문제를 편지로 썼지만, 4월 26일에야 출발 허가를 받았다.[28]
5월 2일, 카를로 알베르토는 사르데냐 프리깃함 "코메르치오"호에 승선하여 리보르노를 출발, 5월 7일 마르세이유에 도착했다. 다음 날 출발하여 18일에 보세기야스에 도착, 프랑스 장군 에티엔 드 보르드술의 사단에 배속되었다. 24일, 마드리드에 도착하여 6월 2일까지 머물렀다가 남쪽으로 출발했다. 시에라 모레나를 넘는 도중 적과의 충돌에서 용기를 보여, 프랑스로부터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받았다. 코르도바, 우트레라, 헤레스 데 로스 카바예로스, 엘 푸에르토 데 산타 마리아를 거쳐 스페인 헌법 정부의 마지막 피난처였던 카디스 요새, 트로카데로 공격 명령을 기다렸다.[29]
1823년 8월 말, 프랑스 함대의 해상 지원을 받아 트로카데로 공격을 개시했다. 카를로 알베르토는 요새로 들어가는 유일한 통로인 운하를 건너는 군대의 선봉에서 싸웠다. 제6왕실근위대 연대의 깃발을 들고 물에 뛰어들어 운하를 건너 적의 참호로 뛰어들었다. 적 포로들이 살해당하는 것을 막으려 했고,[30] 프랑스 병사들은 그에게 공격 중 사망한 장교의 어깨 견장을 주어 그를 일반 척탄병과 구별할 수 있게 했다.[31]
카를로 알베르토는 해질 때까지 자리에 남아 있었고, 다음 날 트로카데로에 처음으로 진입한 사람들 중 한 명이었다. 페르난도 7세와 그의 사촌인 왕비 마리아 조제파 아말리아는 석방되었고, 그를 만나 기뻐하며 포옹했다. 9월 2일, 성대한 군사 퍼레이드가 열렸고, 앙굴렘 공작은 카를로 알베르토에게 생 루이 훈장을 수여했다.[32]
5. 1. 피렌체 망명


1823년 초, 앙굴렘 공작 루이 앙투안은 유럽 열강들이 스페인의 자유주의 혁명을 진압하고 페르디난드 7세를 스페인 왕위에 복귀시키는 임무를 맡긴 프랑스 원정군의 지휘를 맡았다. 카를로 알베르토는 자신의 회개를 보여주고자 원정군에 참여하고자 했다. 그는 1823년 2월 20일 처음으로 이 문제에 대해 샤를 펠릭스에게 편지를 썼지만, 4월 26일에야 출발 허가를 받았다.[28]
5월 2일, 카를로 알베르토는 사르디니아 프리깃함 "코메르치오"호에 승선하여 리보르노를 출발, 5월 7일 마르세이유에 도착했다. 다음 날, 카를로 알베르토는 출발하여 18일에 보세기야스에 도착했다. 그곳에 도착했을 때 그는 프랑스 장군 에티엔 드 보르드술의 사단에 배속되었다. 24일, 그는 마드리드에 도착하여 6월 2일까지 머물렀다가 남쪽으로 출발했다. 시에라 모레나를 넘는 도중 적과의 충돌에서 그는 용기를 보였고, 프랑스는 그를 레지옹 도뇌르 훈장 수여자로 임명했다. 그는 코르도바, 우트레라, 헤레스 데 로스 카바예로스, 엘 푸에르토 데 산타 마리아를 거쳐 스페인 헌법 정부의 마지막 피난처였던 카디스 요새, 트로카데로를 공격하라는 명령을 기다렸다.[29]
1823년 8월 말, 프랑스 함대의 해상 지원을 받아 군대는 트로카데로 공격을 개시했다. 카를로 알베르토는 요새로 들어가는 유일한 통로인 운하를 건너는 군대의 선봉에서 싸웠다. 그는 제6왕실근위대 연대의 깃발을 들고 물에 뛰어들어 운하를 건너 적의 참호로 뛰어들었다. 그는 적 포로들이 살해당하는 것을 막으려고 했고,[30] 프랑스 병사들은 그에게 공격 중 사망한 장교의 어깨 견장을 주어 그를 일반 척탄병과 구별할 수 있게 했다.[31]
카를로 알베르토는 해질 때까지 자신의 자리에 남아 있었고, 다음 날 그는 트로카데로에 처음으로 진입한 사람들 중 한 명이었다. 페르디난드 7세와 그의 사촌인 왕비 마리아 조제파 아말리아는 석방되었고, 그를 만나 기뻐하며 포옹했다. 9월 2일에는 성대한 군사 퍼레이드가 열렸고, 그 후 앙굴렘 공작은 카를로 알베르토에게 생 루이 훈장을 수여했다.[32]
5. 2. 스페인 원정
1823년 초, 앙굴렘 공작 루이 앙투안은 유럽 열강이 스페인의 자유주의 혁명을 진압하고 페르난도 7세를 스페인 왕위에 복귀시키는 임무를 맡은 프랑스 원정군의 지휘를 맡았다. 카를로 알베르토는 자신의 회개를 보여주고자 원정군에 참여하려 했다. 1823년 2월 20일 샤를 펠릭스에게 처음으로 이 문제를 편지로 썼지만, 4월 26일에야 출발 허가를 받았다.[28]
5월 2일, 카를로 알베르토는 사르데냐 프리깃함 "코메르치오"호에 승선하여 리보르노를 출발, 5월 7일 마르세이유에 도착했다. 다음 날 출발하여 18일에 보세기야스에 도착, 프랑스 장군 에티엔 드 보르드술의 사단에 배속되었다. 24일, 마드리드에 도착하여 6월 2일까지 머물렀다가 남쪽으로 출발했다. 시에라 모레나를 넘는 도중 적과의 충돌에서 용기를 보여, 프랑스로부터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받았다. 코르도바, 우트레라, 헤레스 데 로스 카바예로스, 엘 푸에르토 데 산타 마리아를 거쳐 스페인 헌법 정부의 마지막 피난처였던 카디스 요새, 트로카데로 공격 명령을 기다렸다.[29]
1823년 8월 말, 프랑스 함대의 해상 지원을 받아 트로카데로 공격을 개시했다. 카를로 알베르토는 요새로 들어가는 유일한 통로인 운하를 건너는 군대의 선봉에서 싸웠다. 제6왕실근위대 연대의 깃발을 들고 물에 뛰어들어 운하를 건너 적의 참호로 뛰어들었다. 적 포로들이 살해당하는 것을 막으려 했고,[30] 프랑스 병사들은 그에게 공격 중 사망한 장교의 어깨 견장을 주어 그를 일반 척탄병과 구별할 수 있게 했다.[31]
카를로 알베르토는 해질 때까지 자리에 남아 있었고, 다음 날 트로카데로에 처음으로 진입한 사람들 중 한 명이었다. 페르난도 7세와 그의 사촌인 왕비 마리아 조제파 아말리아는 석방되었고, 그를 만나 기뻐하며 포옹했다. 9월 2일, 성대한 군사 퍼레이드가 열렸고, 앙굴렘 공작은 카를로 알베르토에게 생 루이 훈장을 수여했다.[32]
5. 3. 파리 방문과 토리노 귀환
1823년 초, 앙굴렘 공작 루이 앙투안은 유럽 열강들이 스페인의 자유주의 혁명을 진압하고 페르디난드 7세를 스페인 왕위에 복귀시키는 임무를 맡긴 프랑스 원정군의 지휘를 맡았다. 카를로 알베르토는 자신의 회개를 보여주고자 원정군에 참여하고자 했다. 그는 1823년 2월 20일 처음으로 이 문제에 대해 샤를 펠릭스에게 편지를 썼지만, 4월 26일에야 출발 허가를 받았다.[28]
5월 2일, 카를로 알베르토는 사르디니아 프리깃함 "코메르치오"호에 승선하여 리보르노를 출발, 5월 7일 마르세이유에 도착했다. 다음 날, 카를로 알베르토는 출발하여 18일에 보세기야스에 도착했다. 그곳에 도착했을 때 그는 프랑스 장군 에티엔 드 보르드술(Étienne Tardif de Pommeroux de Bordesoulle)의 사단에 배속되었다. 24일, 그는 마드리드에 도착하여 6월 2일까지 머물렀다가 남쪽으로 출발했다. 시에라 모레나를 넘는 도중 적과의 충돌에서 그는 용기를 보였고, 프랑스는 그를 레지옹 도뇌르 훈장 수여자로 임명했다. 그는 코르도바, 우트레라, 헤레스 데 로스 카바예로스, 엘 푸에르토 데 산타 마리아를 거쳐 스페인 헌법 정부의 마지막 피난처였던 카디스 요새, 트로카데로를 공격하라는 명령을 기다렸다.[29]
1823년 8월 말, 프랑스 함대의 해상 지원을 받아 군대는 트로카데로 공격을 개시했다. 카를로 알베르토는 요새로 들어가는 유일한 통로인 운하를 건너는 군대의 선봉에서 싸웠다. 그는 제6왕실근위대 연대의 깃발을 들고 물에 뛰어들어 운하를 건너 적의 참호로 뛰어들었다. 그는 적 포로들이 살해당하는 것을 막으려고 했고,[30] 프랑스 병사들은 그에게 공격 중 사망한 장교의 어깨 견장을 주어 그를 일반 척탄병과 구별할 수 있게 했다.[31]
카를로 알베르토는 해질 때까지 자신의 자리에 남아 있었고, 다음 날 그는 트로카데로에 처음으로 진입한 사람들 중 한 명이었다. 페르디난드 7세와 그의 사촌인 왕비 마리아 조제파 아말리아(Maria Josepha Amalia of Saxony)는 석방되었고, 그를 만나 기뻐하며 포옹했다. 9월 2일에는 성대한 군사 퍼레이드가 열렸고, 그 후 앙굴렘 공작은 카를로 알베르토에게 생 루이 훈장을 수여했다.[32]


원정군이 해산되자 카를로 알베르토는 세비야에서 파리로 이동하여 1823년 12월 3일에 도착했다. 프랑스 수도에서 그는 무도회, 접견, 파티에 참석했고, 베리 공작 부인인 마리 카롤린과 긴밀한 관계를 맺었다. 12월 15일, 루이 18세 국왕은 트로카데로 전투 승리자들을 위한 성대한 환영회를 열었고, 카를로 알베르토는 명예 손님으로 참석했다.[33]
사르데냐의 카를로 펠리체 국왕은 카를로 알베르토의 성공을 바탕으로 그가 토리노로 돌아올 때가 되었다고 판단했다. 왕자는 "권력에 오를 때, 수세기 동안 행운과 영광을 가져다준 군주제의 모든 기본 법률을 존중하고 엄격히 준수할 것"을 맹세해야 했다. 1824년 1월 29일, 카를로 알베르토는 토리노로 출발할 허가를 받았다. 루이 18세와의 마지막 만남에서 그는 통치에 대한 조언을 듣고 프랑스 군주제의 가장 권위 있는 기사 작위인 성령 기사단에 입단했다.[34]
2월 2일, 카를로 알베르토는 출발했고 6일에 몽세니에 도착하여 시위를 피하기 위해 야간에 토리노에 입성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카를로 알베르토는 아마도 23일에 그렇게 했다.[35] 토리노로 돌아온 후, 카를로 알베르토는 주로 라코니지 성에 거주하면서 통치 준비를 시작했다. 그는 궁정에서 거의 주목받지 못했던 경제라는 과목을 공부하기 시작했고, 1829년에는 사르데냐를 방문할 허가를 받았다. 이 방문을 통해 그는 섬의 상황을 정확하게 이해하게 되었다. 그는 다작의 작가였다. 1827년, 그는 아내와 함께 가족이 집에서 사용하는 프랑스어로 자녀들을 위해 38편의 동화를 썼는데, 그 제목은 ''Contes moraux''(도덕적 이야기)이다. 이듬해 그는 코미디에 도전했고, 그 후 문학 비평과 역사에 매달렸다. 그는 "왈덴스파르티에 대한 메모", "안달루시아 기록", "사르데냐 여행"의 세 작품을 출판했다. 카를로 알베르토는 이 모든 것을 후회하여 나중에 유통을 중단하도록 명령했다. 그는 또한 방대한 분량의 편지와 문학적 글을 남겼다.[36]
당시의 보수적인 태도에도 불구하고, 카를로 알베르토는 피에몬테에서 책이 금지된 카를로 주세페 굴리엘모 보타와 같이 자유주의적 사상을 가진 문인들을 지지했다. 그는 애덤 스미스의 저서와 나폴레옹을 지지했던 Pietro Custodi|피에트로 쿠스토디it가 편집한 ''정치 경제에 관한 고전 이탈리아 작가들의 모음집''을 소장하고 있었다.[37]
6. 즉위와 친 오스트리아 정책 (1831-1845)
카를로 알베르토는 7월 혁명의 영향으로 오스트리아 제국과 동맹을 맺었다. 1831년 체결된 조약은 사르데냐 왕국의 방위를 오스트리아에 맡겼으나, 전쟁 시 연합군 사령관은 카를로 알베르토가 맡기로 되어 있었다. 그는 오스트리아 대사에게 편지를 보내 프랑스와의 전쟁에 참전하는 것이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운 날이 될 것이라고 밝혔다.[42]
카를로 알베르토는 합법주의적 입장에 따라 베리 공작 부인 마리 카롤린이 아들 앙리, 샹보르 백작을 프랑스 왕위에 올리려는 시도를 지원했다. 1832년, 카를로 알베르토는 마리 카롤린에게 을 빌려주고 합법주의 자원병을 프랑스로 수송하는 증기선을 제공했으나, 이 음모는 실패했다.[43][44]
6. 1. 루이 필리프의 프랑스와의 갈등
7월 혁명으로 루이 필리프가 프랑스 왕위에 오르자, 카를로 알베르토는 오스트리아 제국과 동맹을 맺기로 결정했다. 1831년 7월 23일에 체결된 조약은 사르데냐 왕국의 방위를 오스트리아에 맡겼지만, 전쟁 시 연합군 사령관은 카를로 알베르토가 맡기로 되어 있었다. 그는 오스트리아 대사에게 편지를 보내 프랑스와의 전쟁에 참전하는 것이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운 날이 될 것이라고 밝혔다.[42]카를로 알베르토는 합법주의적 입장에 따라 1823년 12월, 베리 공작 부인 마리 카롤린이 자신의 아들 앙리, 샹보르 백작을 프랑스 왕위에 올리려는 시도를 지원했다. 베리 공작 부인 마리 카롤린은 샤를 10세의 차남 베리 공작의 미망인이었으며, 장남인 앙굴렘 공작 루이 앙투안은 왕위를 포기한 상태였다. 그러나 앙리의 왕위 계승은 국왕에 의해 거부되었다.[43]
1832년, 카를로 알베르토는 프랑스 대사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마리 카롤린에게 을 빌려주고 합법주의 자원병들을 프랑스로 수송하기 위한 증기선을 제공했다. 그러나 이 음모는 발각되어 실패했고, 증기선은 마르세유에서 저지되었으며 자원병들은 반데에서 패배했다. 마리 카롤린은 도주 후 체포되어 블라에 요새에 투옥되었다.[44]
6. 2. 통치 철학과 개혁
카를로 알베르토는 보수적인 성향에도 불구하고, 법률을 조사하고 국가를 현대화하기 위해 14명의 회원으로 구성된 국무원을 설립했다. 그는 왕족과 왕실 관리들의 수입 관세 특별 면제를 폐지하고, 고문을 금지했으며, 사형수의 시체 훼손과 범죄자 재산 몰수를 금지하는 등 개혁적인 조치를 취했다. 또한 문화에도 큰 관심을 기울여 1832년 팔라초 마다마(현재 토리노 고대 미술 시립 박물관)에 "왕립 회화관 및 미술관"과 팔라초 레알레의 도서관을 설립했다. 여러 기념물과 궁전을 건설하고, 1833년 예술 아카데미를 알베르티나 아카데미로 재건립했으며, 같은 해 "조국의 역사 연구를 위한 왕립 재단"을 설립하여 19세기 역사 연구 재단들의 모델이 되었다.[48]카를로 알베르토는 상업 자유화라는 경제 정책도 추진했다. 1834년 곡물세를 인하하고, 이듬해 생사 수출을 합법화했다. 이후 원자재(석탄, 금속, 섬유) 수입 관세를 감면하고, 해외 산업 기계 도입을 지원했다. 이러한 정책으로 왕국 재정은 1835년부터 흑자를 기록했으며, 농업, 도로, 철도, 항만 개선에 투자할 수 있게 되었다.[49]
또한 군대를 개혁하고 법전을 개정했으며, 상고법원을 설치하고 1838년 사르데냐에서 봉건제를 폐지했다. 신용 기관 설립을 가능하게 하고 공공 기관과 국가를 개혁했으며, 종교 지도자들의 통제를 다소 완화했다. 왕실에는 성직자가 50명 이상 있었는데, 이는 작은 왕국 규모에 비해 호화로운 수준이었다. 왕실에는 요리사, 집사, 웨이터, 목수, 무사, 마구간지기, 시종, 하인, 의전관 등 많은 인원이 있었다.[50][51]
카부르 등 온건 개혁론자들을 통해 근대화 정책을 추진하며 어느 정도 진보적인 모습을 보였지만, 카를로 알베르토는 급진적인 개혁 운동을 비판하고 무력 진압도 불사하는 등 한계를 드러냈다. 그는 열렬한 기독교 신자이자 전쟁광이었으며, 반동적인 군주의 면모를 지녔다. 하지만 소심하고 우유부단한 성격 탓에 온건파 개혁론자들과 협력하기도 했다. 그의 가정교사 ジェルベ・デ・ソナズ는 "도덕적 의지와 힘이 전혀 없다"고 평가했다. 1833년 청년 이탈리아당을 무자비하게 탄압한 것은 절대 군주로서의 자부심 때문으로 여겨진다.
그의 우유부단함은 "균형 잡혔다"기보다 "일관성 없는" 개혁을 낳았다. 법전 근대화를 추진하면서도 장자 상속제와 교회 재판소를 부활시키거나, 근대 상업의 걸림돌인 길드를 해체하면서도 "종교적 의식 참여"를 이유로 존속을 허용하는 등 개혁 효과를 반감시키는 행위를 반복했다. 이러한 행보는 대외적으로 정통주의 입장을 취한 것과 맞물려 국내외 고립을 초래했다.
국민 지지가 멀어지자 위기감을 느낀 알베르토는 통치 후반 개혁파 의견을 적극 수용했지만, 그 대가로 일부 개혁파의 극단적인 민족주의에 경도되었다. 영웅이 되고 싶었던 그는 이탈리아 구원 영웅이라는 이상에 취해 현실을 고려하지 않은 채 반오스트리아 강경주의로 치달았다.
6. 3. 스페인과 포르투갈 반동 세력 지원
페르디난드 7세 국왕 사망 후, 스페인은 두 파벌로 나뉘었다. 합법주의자 돈 카를로스(Don Carlos)의 야망을 지지한 반자유주의 반동파와 마리아 크리스티나(Maria Christina of the Two Sicilies)의 이사벨라 2세 섭정을 옹호한 헌정주의자들이었다. 신성 동맹(Holy Alliance)의 러시아, 오스트리아, 그리고 프로이센(Prussia)은 돈 카를로스를 지지했고, 영국(Great Britain), 프랑스, 그리고 포르투갈은 헌정주의자들을 지지했다. 카를로 알베르토는 전자 집단을 지지했지만, 1833년부터 1840년까지 이어진 카를로스 전쟁(Carlist War)에서는 헌정주의자들이 승리했다.[52] 마찬가지로, 주앙 6세 사망 후에 일어난 포르투갈 자유주의 전쟁(Liberal Wars) (1828년-1834년)에서도 카를로 알베르토는 피에몬테에 머물렀던 돔 미구엘(Dom Miguel)의 절대주의자들을 지지했다. 이 경우에도, 돔 미구엘의 형제 돔 페드로(Dom Pedro)가 이끄는 자유주의자들은 영국과 루이 필립의 프랑스의 지원을 받았고, 궁극적으로 성공했다.6. 4. "청년 이탈리아" 탄압
1831년 카를로 알베르토가 즉위했을 당시, 사르데냐 왕국은 혁명가들의 음모와 침략 시도로 어려움을 겪었다. 1833년 4월 제노바에서는 마치니의 청년 이탈리아에 소속된 하급 장교 두 명이 체포되었다.[53] 샤를 알베르는 마치니의 조직을 "가장 무섭고 잔혹한" 것으로 여겨 법에 따라 최대한 엄격하게 조사를 진행하도록 명령했다.[53]
결국 12명이 총살형에 처해졌고, 2명은 감옥에서 자살했다. 21명이 사형을 선고받았지만, 도망쳤거나 마치니처럼 해외에 있었기 때문에 사형을 집행할 수 없었다. 샤를 알베르는 사면을 허락하지 않았고, 토리노 주재 프랑스와 영국 대사는 처벌의 가혹함과 자비의 부족에 대해 항의했다. 샤를 알베르는 진압에 주도적인 역할을 한 사람들에게 훈장을 수여하여 감사를 표했다.[54]
1834년, 마치니는 스위스에서 군대를 조직하여 사보이(당시 사보이아 공국의 일부)를 공격하고, 동시에 국민들이 국왕에 대항하여 봉기할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이 계획은 사전에 유출되었고, 샤를 알베르는 매복을 준비했다.[55] 2월 2일에 시작된 침략은 조직의 부재와 스위스의 저지 노력으로 인해 실패했다. 몇몇 음모자만이 레제셸의 병영을 공격했으나, 그중 두 명은 체포되어 총살형에 처해졌다. 이 과정에서 카라비니에리 it가 사망했고, 샤를 알베르는 그를 기리기 위해 이탈리아 역사상 최초의 금메달을 제정했다. 한편, 도시에서 봉기를 이끌 준비를 하고 있던 가리발디는 모든 것이 끝났다는 보고를 받고 도망쳤다. 그는 결석재판으로 사형을 선고받았다.[56]
카부르를 비롯한 왕국 내 온건 개혁론자들을 통해 근대화 정책을 추진했지만, 카를로 알베르토 자신은 급진적인 개혁 운동에는 항상 비판적이었으며, 진압에는 무력 행사도 마다하지 않았다. 1833년에 있었던 청년 이탈리아당에 대한 무자비한 탄압도 절대 군주로서의 자부심 때문이 크다고 여겨진다.
6. 5. 법 개혁
카를로 알베르토는 왕국을 현대화하고 국민의 요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개혁의 필요성을 느꼈다. 즉위 직후 그는 민법, 형법, 상법 및 절차법을 제정할 위원회를 구성했다. 1837년 6월 20일, 나폴레옹 법전에서 부분적으로 영감을 받은 새로운 민법이 공포되었다. 1839년 10월 26일에는 새로운 형법이 발표되었는데, 카를로 알베르토는 이 과정에서 사형을 최대한 제한하는 교정 사법의 개념을 강조했다. 그러나 신성 모독이나 자살을 한 사람에게는 매우 엄격한 형벌을 내렸다. 1842년에는 상법과 형사소송법이 공포되었고, 피고인의 권리를 보장하는 혁신적인 내용을 담고 있었다.카부르 등 온건 개혁론자들을 통해 근대화 정책을 추진하여 어느 정도 진보적인 정책을 펼쳤다. 그러나 카를로 알베르토 자신은 급진적인 개혁 운동에는 비판적이었으며, 진압에 무력 행사도 주저하지 않았다. 그의 우유부단한 성격은 "일관성 없는" 개혁을 낳았다. 법전의 근대화를 추진하면서도 장자 상속제와 교회 재판소의 부활을 포함시키거나, 길드 해체를 법으로 정하면서도 "종교적 의식 참여"를 이유로 남겨두는 것을 허용하는 등 개혁의 효과를 희석시키는 행위를 자주 했다.
6. 6. 오스트리아와의 관계 악화
1840년 동방 위기 당시 샤를 알베르토는 포 계곡에서 영토 확장 계획을 세웠다.[1] 같은 해, 사르데냐 왕국이 스위스에 소금을 공급하지 않겠다는 내용의 구 협정을 위반하자, 오스트리아는 피에몬테 와인의 롬바르디아-베네토 수입 관세를 100% 인상했다. 샤를 알베르토는 이에 맞서 제노바에서 마조레 호까지 철도를 건설하여 오스트리아의 항구 도시 트리에스테를 유지하는 독일 상업을 리구리아 항구로 끌어들이겠다고 위협했다.[57]이러한 분쟁에도 불구하고 양국 간 외교 관계는 양호하게 유지되었으며, 샤를 알베르토의 장남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와 롬바르디아-베네토의 오스트리아 총독이자 샤를 알베르토의 매형인 합스부르크-로트링겐가의 라인어 요제프의 딸 오스트리아의 아델라이데의 결혼으로 절정에 달했다.
카부르 등 온건 개혁론자들을 통해 근대화를 추진했지만, 카를로 알베르토 자신은 진보주의자들을 만족시키지 못했고, 급진적인 개혁 운동을 무력으로 진압하기도 했다. 그는 열렬한 기독교 신자이자 반동적인 군주였지만, 소심하고 우유부단한 성격으로 인해 온건파 개혁론자들과 협력하기도 했다. 그의 가정교사였던 ジェルベ・デ・ソナズ는 그를 "도덕적 의지와 힘이 전혀 결여되어 있다"고 평가했다.
그의 우유부단한 태도는 "균형 잡힌" 개혁보다는 "일관성 없는" 개혁을 낳았다. 법전 근대화를 추진하면서도 장자 상속제와 교회 재판소 부활을 포함시키거나, 길드 해체를 법으로 정하면서도 "종교적 의식 참여"를 이유로 남겨두는 것을 허용하는 등 개혁 효과를 희석시키는 행위를 반복했다.
국민의 지지가 멀어지는 것에 위기감을 느낀 알베르토는 통치 후반에 개혁파 의견을 적극 수용했지만, 그 대가로 극단적인 민족주의에 경도되었다. 영웅이 되고 싶은 욕망이 강했던 알베르토는 자신이 이탈리아를 구원하는 영웅이 된다는 이상에 취해 현실적인 상황을 고려하지 않는 강경한 반오스트리아주의에 치우쳐 갔다.
7. 자유주의 군주 시대 (1845-1849)
1845년 리미니와 교황령에서 혁명 운동이 발생하자, 마시모 다젤리오에게 카를로 알베르토는 오스트리아와의 갈등이 발생하면 이탈리아 독립을 위해 모든 것을 바쳐 싸울 것이라고 말했다.[58] 1846년 메테르니히 총리의 명령에 따라 투린 주재 오스트리아 대사는 카를로 알베르토에게 오스트리아와 혁명가 중 어느 편인지 입장을 명확히 밝힐 것을 요구했다. 카를로 알베르토는 망설였지만, 교황 비오 9세가 교황으로 선출되면서 정치범 사면과 오스트리아의 페라라 점령에 대한 항의를 하자, 그에게 지지 의사를 표하는 서한을 보냈다.[59]
1847년 9월, 카를로 알베르토는 국왕이 군대와 귀엘프파를 지휘하는 독립 전쟁을 수행할 수 있는 힘을 신이 주시기를 바란다는 내용의 서한을 작성하도록 하였다. 카를로 알베르토는 반오스트리아 시위를 진압했지만, 궁정과 정부는 여전히 분열되어 있었다. 외무장관과 대주교는 반오스트리아 정책을 위험하다고 여겼지만, 전쟁장관, 체사레 알피에리 디 소스테뇨, 체사레 발보, 마시모 다젤리오와 로베르토 다젤리오, 카부르 백작은 이를 지지했다.[60]
국민들의 요구는 거세졌지만 항상 수용된 것은 아니었다. 카를로 알베르토는 예수회 추방 요구는 받아들이지 않았지만,[58] 1847년 11월 29일 완전 합병을 실시하여 본토의 개혁을 사르데냐 섬으로 확대했다. 1848년 초 민족의 봄이 발발하고 페르디난드 2세가 시칠리아 왕국에 헌법을 부여하자, 카를로 알베르토는 군주제의 기본법을 존중하겠다는 맹세에 얽매여 있었다.[61]
1848년 이탈리아 각지에서 반(反)오스트리아, 반(反)왕정 폭동이 발생하자, 카를로 알베르토는 오스트리아 제국에 선전포고를 하고 제1차 이탈리아 독립 전쟁|Prima guerra di indipendenza italianait을 일으켰다. 그러나 카를로 알베르토와 공화파 반란군은 서로 불신하여 단결하지 못했고, 사르데냐 왕국군은 원정 준비가 부족했다.
반란군의 활약으로 롬바르디아가 점령되고, 마닌이 이끄는 베네토 공화국이 피에몬테와의 합병을 결정한 후에도, 카를로 알베르토는 가리발디도 참여했던 공화파 반란군 병사들에게 경멸적인 태도를 보였다. 또한 라데츠키 장군 지휘 아래 오스트리아군이 전열을 재정비하는 동안, 카를로 알베르토는 북부 지역 왕당파를 지원하여 공화파를 공격했다.
1848년 쿠스토차 전투에서 오스트리아군이 승리하고 사르데냐군은 밀라노로 후퇴했다. 카를로 알베르토는 반란군을 불신하여 밀라노를 버리고 토리노로 돌아갔다.
7. 1. 알베르티노 헌장



1848년 1월 7일, 토리노의 유로파 호텔에서 시내 기자들이 모임을 가졌고, 이 자리에서 카보우르(Cavourit)는 《리스오르지멘토》(Risorgimentoit)의 편집장으로서 국왕에게 헌법을 요구할 것을 제안했다. 대다수의 장관들 또한 헌법 허용에 찬성했다. 카를로 알베르토(Carlo Albertoit)는 어떻게 해야 할지 확신하지 못했고, 빅토르 에마뉘엘 1세처럼 퇴위를 고려하기도 했다. 그는 후계자를 준비하도록 아들을 불렀지만, 아들은 아버지를 설득하여 자리를 유지하도록 했다.[62]
2월 7일, 특별 국무회의가 소집되었다. 7명의 장관, 최고 성 아누치아타 훈장(Supreme Order of the Most Holy Annunciationit) 수여자 및 기타 고위 인사들이 참석했다. 토론은 여러 시간 동안 이어졌다. 창백한 얼굴의 카를로 알베르토는 침묵 속에 경청했다. 드 라 투르(De La Tour프랑스어), 카를로 주세페 베라우도 디 프랄로르모, 루이지 프로바나 디 콜레뇨는 헌법에 반대했다. 점심 휴식 시간 동안 카를로 알베르토는 수도에서 온 대표단을 만났는데, 대표단은 국민의 이익과 질서 유지를 위해 헌법을 요구했다.[63]
결정을 내려야 했고, 내무장관 지아친토 보렐리(Giacinto Borelliit)가 헌법 초안을 작성하도록 지명되었다. 문서가 승인되었고 "헌장"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카를로 알베르토는 가톨릭교의 우월한 지위와 군주제의 명예가 명확하게 명시되지 않으면 문서를 승인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그러한 내용이 포함되었기에 그는 그것을 승인했다. 새벽에 회의는 해산되었다.[64]
2월 8일 오후 3시 30분경, 토리노 거리에 왕실 칙령이 게시되었는데, 이 칙령에는 대의 정부 시스템의 기초를 형성하는 14개 조항으로 구성된 헌장이 명시되어 있었다. 오후 6시까지 도시 전체가 불을 밝혔고, 카를로 알베르토를 지지하는 대규모 시위가 열렸다.[65]
칙령은 가톨릭 신앙이 유일한 국교임을 명시했고, 행정권과 무장 세력의 지휘권은 국왕에게 있음을 밝혔다. 입법권은 두 개의 의회에 부여되었고, 그중 하나는 선출될 것이었다. 언론의 자유와 개인의 자유가 보장되었다. 모든 조항을 포함한 헌장의 완전한 버전은 1848년 3월 4일에 합의되었고 같은 날 카를로 알베르토에 의해 승인되었다. 헌장 발표는 피에몬테 전역에서 큰 열광을 불러일으켰다. 체사레 발보가 주재하는 최초의 헌법 정부는 밀라노 5일간의 항쟁이 시작되기 이틀 전인 1848년 3월 16일에 취임했다.[66]
7. 2. 민족의 봄

1845년, 리미니와 교황령에서 혁명 운동이 발발했다. 당시 사건을 보고하러 온 마시모 다젤리오에게 카를로 알베르토는 "오스트리아와의 갈등이 발생하는 날, 그는 아들들과 군대, 그리고 그의 모든 것을 던져 이탈리아의 독립을 위해 싸울 것"이라고 말했다.[58]
1846년 6월 8일, 메테르니히 총리의 명령에 따라 투린 주재 오스트리아 대사인 칼 페르디난트 폰 부올 백작은 카를로 알베르토에게 오스트리아 편인지 혁명가 편인지 그의 입장을 명확히 해줄 것을 요청했다. 사르데냐 국왕은 망설였다. 그 사이 6월 16일에 교황 비오 9세가 교황으로 선출되었다. 그의 첫 번째 업무는 정치범들의 사면이었다. 새 교황은 오스트리아가 교황청의 영토인 페라라를 동의 없이 점령한 것에 대해 항의했다. 교황 비오 9세를 통해 자신의 충성심과 구(舊) 자유주의적 사상을 조화시킬 수 있는 방법을 찾은 카를로 알베르토는 그에게 지지 의사를 표하는 서한을 보냈다.[59]
1847년 9월, 카를로 알베르토의 비서인 체사레 트라부코it는 9월 2일 서한을 작성할 권한을 받았는데, 그 서한에서 국왕은 군대와 귀엘프파를 지휘하는 독립 전쟁을 수행할 수 있는 힘을 신이 주시기를 바란다는 희망을 표명했다. 이러한 선언으로 카를로 알베르토는 훨씬 더 인기를 얻었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반오스트리아 시위를 진압했는데, 궁정과 정부가 여전히 분열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외무장관 솔라로 델라 마르게리타와 루이지 프란소니 대주교 Luigi Fransoniit는 반오스트리아 정책이 매우 위험하다고 여겼지만, 전쟁장관 에마누엘레 페스 디 빌라마리나it, 체사레 알피에리 디 소스테뇨, 체사레 발보, 마시모 다젤리오와 로베르토 다젤리오, 그리고 젊은 카부르 백작은 이를 지지했다.[60]
한편, 국민들의 요구는 점점 거세졌고, 항상 수용된 것은 아니었다. 예를 들어 이 시기에 카를로 알베르토는 이미 정치 저술에서 금지했던 예수회의 추방을 요구하는 제노바 대표단의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았다.[58] 그러나 그는 1847년 11월 29일, 사보이아 왕국의 소위 완전 합병을 실시하여 본토에서 실시된 개혁을 사르데냐 섬으로 확대했다. 1848년 초, 민족의 봄이 발발한 후 페르디난드 2세가 시칠리아 왕국에 헌법을 부여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투린에서는 나폴리 국왕과 교황을 향한 환호가 터져 나왔지만, 카를로 알베르토는 샤를 펠릭스에게 맹세했던 군주제의 모든 기본법을 존중하고 절대주의 통치를 유지하겠다는 맹세에 얽매여 있었다.[61]

1846년 선출된 새로운 교황 비오 9세는 낡은 바티칸 제도를 해체하고 언론 자유를 허용하며, 외국 용병 대신 시민 경비대를 설치하고, 장관 평의회를 구성하는 등 이탈리아 자유주의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1848년 1월 12일, 팔레르모에서 반란이 일어났고, 시칠리아 왕국의 페르디난도 2세는 헌법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1848년 2월 프랑스에서 혁명이 일어나 루이 필립 국왕이 퇴위하고 공화국이 수립되면서 유럽 전역은 더욱 격변했다. 이 혁명은 3월 18일 밀라노로, 그 후 베네치아로, 마지막으로 빈으로 확산되었고, 빈에서는 폭동으로 메테르니히가 도망치고 페르디난트 1세 황제가 퇴위했다.[67]
밀라노에서는 샤를 알베르토가 오스트리아에 대한 전쟁을 선포할 기회를 잡을 것으로 예상되었다. 3월 19일/20일, 밀라노 자유주의자 Francesco Arese Lucini (senatore)it가 토리노에서 온 명확한 메시지를 전달했다.
왕국의 자원이 부족했지만, 피에몬테 군대는 동원을 시작했다. 대부분의 군대는 서부 국경에 배치되었는데, 동부 국경은 오스트리아와의 동맹 조약으로 안전하게 보호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샤를 알베르토는 이것이 자신의 영토를 롬바르디아로 확장할 수 있는 특별한 기회임을 깨달았다. 따라서 그는 밀라노 시민들이 사르데냐 왕국에 합류하는 데 동의한다면 그들을 위해 개입할 것이라고 말했다.[69]
1848년 3월 23일, 밀라노 주재 피에몬테 대사는 오스트리아군이 밀라노에서 철수했고 가브리오 카사티가 이끄는 임시 정부가 수립되어 샤를 알베르토에게 동맹을 요청했다는 소식을 가지고 토리노로 돌아왔다.[70] 합병에 대해 별로 열의가 없었던 밀라노 시민들은 국왕에게 군대를 도시 밖에 두고 삼색기인 키살피나 공화국의 깃발을 채택할 것을 요청했다. 합병에 대한 보장을 받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샤를 알베르토는 밀라노 시민들의 조건을 받아들였고, 삼색기 가운데에 사보이아 왕가의 깃발을 배치하는 것만을 요구했다 (이것은 1946년 군주제 몰락까지 사르데냐 왕국, 그리고 이탈리아 왕국의 깃발이 될 것이다). 그는 이탈리아에 주둔한 군대를 당대 최고의 장군 중 한 명인 요제프 라데츠키가 지휘하고 있는 강대국과의 전쟁에 돌입하려 하고 있었다. 잊혀진 그의 반동적인 과거는, 밀라노 대표들과 함께 왕궁 발코니에 나타나 삼색기를 흔들며, 군중이 "이탈리아 만세! 샤를 알베르토 만세!"라고 외치는 가운데 잊혀졌다. 1년 안에 그의 통치는 끝날 것이다.[71]
1848년 이탈리아 각지에서 반(反)오스트리아, 반(反)왕정 폭동이 발생하자, 이에 편승하여 오스트리아 제국에 선전포고를 한다(Prima guerra di indipendenza italianait). 오스트리아군은 북이탈리아에 주둔하는 이탈리아 부대의 반란과 민중군의 조직적인 공격에 크게 동요했지만, 사르데냐 왕국군은 이 기회를 전혀 활용하지 못했다. 그 이유는 알베르토와 공화파 성향이 강한 반란군 모두 불신으로 인해 단결하지 못했고, 사르데냐 왕국군이 원정 준비를 갖추지 못했기 때문이다. 사르데냐 군대는 분명 우수한 군대였지만, 영토 방위와 국내 치안에만 특화되어 있었다. 따라서 토리노의 참모본부는 롬바르디아 지방의 정확한 지도조차 준비하지 못했고, 밀라노 원정군과의 연락은 부족한 채로 계속되었다.
반란군의 활약으로 롬바르디아를 점령하고, 공화파 마닌이 이끄는 베네토 공화국이 왕당파의 설득을 받아 피에몬테와의 합병을 통한 "북이탈리아 왕국" 건설을 결정한 후에도, 참모본부의 부실과 알베르토의 회의적인 태도는 변하지 않았다. 그는 젊은 시절 가리발디도 참여했던 공화파 반란군 병사들에게 찬사를 보내는 대신, 노골적으로 경멸적인 태도로 대했다. 또한 후퇴를 강요당한 오스트리아군이 라데츠키 장군 지휘 아래 전열을 재정비하는 동안, 알베르토는 북부 지역의 왕당파를 지원하여 공화파를 공격하는 데 힘썼다.
1848년, 증원을 얻은 오스트리아군 3만 3000명과 사르데냐군 2만 2000명이 충돌(쿠스토차 전투)하여, 오스트리아 측은 4600명의 사상자를 내면서도 상대방을 격파했다. 사르데냐 측은 8000명의 손실을 내고 밀라노로 후퇴했다. 반란군은 항전 의지를 굳혔지만, 여기서도 반란군을 신뢰하지 않고, 심지어 오스트리아와의 내통이나 왕정 폐지를 모의했다고 의심했던 알베르토는 스스로 밀라노를 버리고 토리노로 돌아가 버렸다.
7. 3. 제1차 이탈리아 독립 전쟁
1848년 이탈리아 각지에서 오스트리아 제국에 대항하는 반(反)오스트리아, 반(反)왕정 폭동이 발생하자, 카를로 알베르토는 이에 편승하여 오스트리아에 선전포고를 하고 제1차 이탈리아 독립 전쟁it을 일으켰다. 그러나 사르데냐 왕국군은 오스트리아군이 북이탈리아 주둔 이탈리아 부대의 반란과 민중군의 공격에 크게 흔들렸음에도 이 기회를 제대로 활용하지 못했다. 카를로 알베르토와 공화파 성향의 반란군 모두 서로를 불신하여 단결하지 못했고, 사르데냐 왕국군 또한 원정 준비가 부족했기 때문이다. 사르데냐 군대는 영토 방위와 국내 치안 유지에 특화되어 있었고, 토리노의 참모본부는 롬바르디아 지방의 지도조차 준비하지 못했으며, 밀라노 원정군과의 연락도 부족했다.[72]반란군의 활약으로 롬바르디아가 점령되고, 공화파 마닌이 이끄는 베네토 공화국이 왕당파의 설득으로 피에몬테와의 합병을 통해 "북이탈리아 왕국" 건설을 결정한 후에도, 참모본부의 부실함과 알베르토의 회의적인 태도는 변하지 않았다. 그는 가리발디도 참여했던 공화파 반란군 병사들에게 찬사를 보내는 대신 경멸적인 태도를 보였다. 또한 후퇴를 강요당한 오스트리아군이 라데츠키 장군 지휘 아래 전열을 재정비하는 동안, 알베르토는 북부 지역의 왕당파를 지원하여 공화파를 공격하는 데 힘을 쏟았다.[73]
1848년 3월 26일, 카를로 알베르토는 군대를 이끌고 보게라로 진격했다. 그는 밀라노 임시 정부가 사르데냐 왕국과의 합병을 지연시키는 것에 우려했지만, 오스트리아군은 콰드릴라테로의 민초 강에 재집결했다. 3월 29일, 국왕은 파비아에 개선 입성하여 밀라노 정부 사절들을 만났다. 4월 8일과 9일, 고이토 전투에서 첫 승리를 거둔 후, 4월 30일 파스트렌고에서 또 다른 승리를 거두었다. 그는 전선을 직접 목격하며, 그의 지휘 아래 부대는 기마 카라비니에리의 돌격으로 흩어진 오스트리아군을 공격했다.[74]
그러나 5월 2일, 교황 비오 9세가 이탈리아 대의에 대한 군사적, 정치적 지원을 철회하면서 카를로 알베르토는 도덕적 정당성을 잃었다. 빈첸초 조베르티가 제안했던 것처럼 교황의 칼이 되어 교황 아래 통합된 이탈리아의 왕이 되겠다는 그의 꿈은 좌절되었다.[75]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베로나로 진격을 계속하여 5월 6일 산타 루치아에서 오스트리아군과 격렬하지만 결정적이지 않은 전투를 벌였다.
5월 21일, 오스트리아와 싸우기 위해 이동 중이던 나폴리 군대 1만 4천 명이 교황의 결정에 따라 페르디난드 2세의 명령으로 귀환했다. 5월 25일, 베네토를 통해 이동 중이던 오스트리아 증원군이 베로나에 있는 라데츠키의 군대에 합류했다. 카를로 알베르토는 야심은 있었지만 전략적 능력은 부족했고, 혼자 전쟁을 계속할 수 없었다. 고이토 전투와 5월 30일 페스키에라 항복은 그의 마지막 승리였다. 오스트리아군은 6월 10일 비첸차를 정복하여 교황 자원병들을 해산시켰고, 7월 22일부터 27일까지 계속된 쿠스토자 전투에서 피에몬테군을 상대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다.[76]
한편, 6월 8일 밀라노 시민과 롬바르디아 시민들은 압도적인 다수로 사르데냐 왕국에 합류하기로 투표했고, 5월 2일에는 파르마 공국 시민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카를로 알베르토에게는 상황이 악화되고 있었다. 패배로 군인들은 분노했고, 굶주리고 지쳐 있었다. 전쟁 회의는 휴전을 모색할 것을 제안했다.
7. 3. 1. 살라스코 휴전
1848년 7월 27일 저녁, 오스트리아는 피에몬테군이 아다 강 서쪽(밀라노에서 동쪽으로 20km 조금 넘는 지점)으로 철수하고, 페스키에라를 포함한 모든 요새를 항복하며, 망명을 강요당했던 파르마와 모데나 공국의 통치자들을 넘기면 휴전을 허락하겠다고 합의했다. 전쟁 수행 방식에 대해 아들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와 의견이 달랐던 카를로 알베르토는 "차라리 죽겠다!"고 외치며 올리오 강(라데츠키가 요구한 지점보다 동쪽으로 25km 더 떨어진 곳)에서 방어할 준비를 했다.[77]오스트리아의 제안이 거부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군대는 결국 올리오 강이 적절한 방어선이 아니라고 판단되어 아다 강으로 철수해야 했다. 아다 강에서 한 장군의 독자적인 기동으로 한 부대가 고립되면서 밀라노 성벽 안으로 후퇴하기 위해 다시 철수해야 했다. 카를로 알베르토는 밀라노 시민들의 저항 의지를 무시하고 그레피 궁전(Palazzo Greppiit)으로 가서 군대의 피에몬테로의 안전한 철수를 허락하는 대가로 오스트리아에 도시를 항복하는 협상을 했다.
다음 날, 밀라노 시민들은 협정 소식을 듣고 격분했다. 군중은 그레피 궁전 앞에서 항의했고, 왕이 발코니에 나오자 소총을 쏘았다. 밀라노 폭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던 귀족 여성 크리스티나 트리불치오 디 벨지오조소의 증언은 다음과 같다.
> 국민군의 일부가 항복 이유를 묻기 위해 카를로 알베르토에게 다가갔다. 그는 그들을 돌려보냈지만, 어쩔 수 없이 몇몇 의원들과 함께 발코니로 나가 사람들에게 연설하고, 밀라노 시민들의 진정한 심정을 몰랐던 것에 대해 사과하며, 그들이 그렇게 빨리 방어에 나선 것에 기뻐하며, 마지막 한 방울의 피까지 그들을 위해 싸울 것을 엄숙히 약속했다. 카를로 알베르토를 향해 소총탄이 발사되었다. 그의 연설 마지막 말에서 분노한 군중은 "항복해서 그렇게 다쳤나요!"라고 소리쳤다. 그러자 왕은 주머니에서 종이 한 장을 꺼내 사람들에게 보여준 후 찢어버렸다.[78]
페르디난도와 알폰소 페레로 라 마르모라 장군은 왕을 안전한 곳으로 데려갔다.[79] 그날 밤 그는 군대와 함께 밀라노를 떠났다.[79] 8월 8일, 카를로 카네라 디 살라스코(Carlo Canera di Salascoit) 장군이 밀라노로 돌아와 오스트리아와 휴전 협상을 벌였고, 8월 9일 살라스코 휴전 협정이 체결되었다. 카를로 알베르토는 프랑스의 지원을 확신했던 빈첸초 조베르티를 포함한 일부 반대에도 불구하고 휴전 협정을 비준했다. 왕은 전 프랑스 외무장관 알퐁스 드 라마르틴이 프랑스는 공화주의자들에게만 그러한 지원을 제공할 것이라고 선언했다고 말했다.[80]
7. 3. 2. 두 번째 전역과 퇴위


샤를 알베르는 첫 번째 전역에 대한 기록을 남긴 후,[81] 휴전을 깨기로 결정했다. 1849년 3월 1일, 의회 개원식에서 그는 전쟁에 대해 분명히 언급했고, 하원은 긍정적으로 반응했다. 곧 재개될 전투를 앞두고, 왕은 공식적으로 군 지휘권을 유지했지만 실질적인 지휘권은 포기했다. 피에몬테 장군을 임명하는 대신, 폴란드 장군 보이치에흐흐자노프스키를 군 사령관으로 임명했다. 3월 8일, 토리노의 군사 회의에서 휴전은 3월 12일에 깨질 것이라고 결정했다. 휴전 조건에 따라, 전투는 8일 후인 3월 20일에 시작되었다.[82]
전쟁은 3월 20일에 재개되었다. 3월 22일, 샤를 알베르는 노바라에 도착했고, 하루 후 라데츠키는 비코카 마을 근처에서 남쪽에서 우세한 병력으로 도시를 공격했다. 흐자노프스키는 몇 가지 중요한 전술적 실수를 저질렀고, 피에몬테 군인들과 최전선에서 아들 페르디난드와 함께 싸운 샤를 알베르 자신의 용기에도 불구하고, 노바라 전투는 참담한 패배로 끝났다.
노바라의 벨리니 궁전으로 돌아온 왕은 "비코카는 우리 군대가 항복할 때까지 세네 번이나 잃고 되찾았습니다... 사령관 [흐자노프스키]는 모든 힘을 다했고, 제 아들들은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했습니다. 제노아 공작 [페르디난드]는 말 두 필을 잃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적이 아래에 있는 도시 성벽 안으로 후퇴했고, 군대는 지쳤습니다. 더 이상의 저항은 불가능합니다. 휴전을 요청해야 합니다."라고 선언했다.[83]
오스트리아의 조건은 매우 가혹했다. 로멜리나와 알레산드리아 요새 점령, 그리고 오스트리아에 맞서 싸운 모든 롬바르디아인들의 항복이었다. 샤를 알베르는 장군들에게 알레산드리아로 가는 길을 열기 위한 최후의 공격이 가능한지 물었으나, 장군들은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군대는 붕괴되었고, 규율은 무너졌으며, 전투에 참여한 많은 병사들이 시골의 집들을 약탈했고, 왕 자신에 대한 공격을 두려워했다.[84]
같은 날 오후 9시 30분, 샤를 알베르는 아들들과 흐자노프스키, 장군 알레산드로 페레로 라 마르모라, Carlo Emanuele La Marmora|카를로 에마누엘레 라 마르모라it, 조반니 두란도, Luigi Fecia di Cossato|루이지 페치아 디 코사토it (휴전을 협상한 사람) 그리고 장관 카를로 카도르나를 소환했다. 그는 양위할 수밖에 없다고 고백했다. 그들은 그를 만류하려고 했지만,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가 더 나은 조건을 얻을 수 있기를 바라며 "내 결정은 신중한 고려의 결과입니다. 이 순간부터 나는 더 이상 왕이 아닙니다. 왕은 나의 아들 비토리오입니다."라고 말하며 논의를 끝냈다.[85]
밀라노와 베네치아의 애국자들을 희생시키고 맺어진 휴전 이후, 사르데냐의 병사와 장교들 사이에는 절망감이 만연했다. 알베르토는 비난의 화살을 돌리기 위해 이듬해 전군을 결집하여 오스트리아군에 결전을 걸었다(노바라 전투). 그러나 이전의 문제점들이 전혀 해결되지 않은 채, 호기만을 놓친 상황에서 행해진 전투에 승산이 있을 리 없었고, 오히려 오스트리아의 승리와 알베르토의 권위 실추를 결정짓는 결과가 되었다. 완전히 입지를 잃은 알베르토는 포르투갈로 망명하여 같은 해 사망했다.
8. 망명과 죽음 (1849)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는 1849년 3월 24일 비냐레에서 라데츠키와 휴전 협정을 맺고 이전보다 더 유리한 조건을 얻어냈다. 오스트리아군은 로멜리나를 일시 점령하고 알레산드리아 요새의 절반만을 "권리"가 아닌 "허락"으로 점유하게 되었다.[86]
카를로 알베르토는 1849년 3월 23일 자정 직후 노바라의 벨리니 궁전을 떠났다. 그는 자신을 바르제 백작(실제로 가지고 있던 작위)이라고 밝혔으나, 오스트리아의 검문소에서 정지당했다. 게오르크 툰 발사시나 장군(1788-1866)이 그를 심문했는데, 그가 카를로 알베르토를 알아봤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포로로 잡힌 저격수에 의해 바르제 백작임이 확인되자, 카를로 알베르토는 통과가 허용되어 남서쪽으로 계속 여행을 했다.[1][87]
전 국왕은 몬칼보, 니차 몬페라토, 아퀴 테르메(아퀴), 사보나, 벤티밀리아, 모나코를 거쳐 3월 26일에 프랑스 니스에 도착했다. 4월 1일에는 대서양 연안 근처 바욘에 있었고, 4월 3일에는 퇴위를 법적으로 확인하라는 투린의 메시지를 받았다.[88]
카를로 알베르토는 토르케마다, 발라돌리드, 레온, 아 코루냐를 거쳐 4월 10일에 도착했고, 말을 타고 4월 15일에 루고에 도착하여 카미냐에서 포르투갈 영토에 진입했다. 4월 19일 정오에 포르투에 도착했다.[89] 그는 간 질환으로 아파 여행을 중단해야 했다.[90]
포르투에 도착한 후, 카를로 알베르토는 건강이 악화되어 2주간 호텔에 머물렀다. 그 후 바다가 보이는 개인 주택으로 거처를 옮겼다. 5월 3일에는 피에몬테 정부의 안부를 전하러 온 지아친토 프로바나 디 콜레뇨와 루이지 치브라리오를 맞이했다.[91] 그는 그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 퇴위했지만, 오스트리아에 대한 새로운 전쟁이 일어난다면... 단순한 병사로서라도 적의 대열에 뛰어들 것입니다... 제가 이루고자 했던 날이 올 것이라는 생각과 희망에 힘입어... 나라에는 저보다 더 나은 왕자가 있었을 수도 있지만, 나라를 더 사랑한 왕자는 없었을 것입니다. 나라를 자유롭고 독립적이며 위대하게 만들기 위해... 저는 기쁜 마음으로 모든 희생을 감수했습니다... 전투에서 죽음을 구했지만 찾지 못했습니다...
이 기간 동안 카를로 알베르토는 점점 쇠약해져 기침과 종기로 고통받았다. 그는 이탈리아에서 온 편지와 신문을 읽었고, 가끔 아내에게 편지를 썼지만, 로빌랑트 백작부인에게는 정기적으로, 그리고 진심을 담아 편지를 썼다. 그는 어머니, 아내, 자녀들의 방문을 금했다.[92]
포르투에 도착한 지 한 달 만에 그의 건강은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악화되었다. 7월 28일 아침에는 상태가 좋아 보였지만, 세 번째 심장마비로 인해 다시 악화되었다. 영적으로 그를 도왔던 포르투갈 신부 안토니우 페이쇼투가 그를 만나 마지막 기름 부음을 행했다. 카를로 알베르토는 라틴어로 “주님, 제 영혼을 당신 손에 맡깁니다(In manus tuas, Domine, commendo spiritum meum)”라고 속삭였다. 그는 십자가를 가슴에 얹고 잠들었고, 오후 3시 30분에 51세를 조금 넘긴 나이로 사망했다.[93]
그의 시신은 포르투 대성당에 안치되었다가 제노바를 거쳐 토리노 대성당에서 장례식을 치른 후, 수페르가 성당 지하 묘지에 안치되었다.[94]
밀라노와 베네치아의 애국자들을 희생시키고 맺어진 휴전 이후, 사르데냐의 병사와 장교들 사이에는 절망감이 만연했다. 비난의 화살을 돌린 알베르토는 그 이듬해 전군을 결집하여 오스트리아군에 결전을 걸었으나(노바라 전투) 패배했다. 완전히 입지를 잃은 알베르토는 포르투갈로 망명하여 같은 해 사망했다.
9. 유산
프리드리히 엥겔스는 카를로 알베르토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적었다.[95]
미국의 역사가 알프레드 테이어 마한은 카를로 알베르토를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96]
10. 가족
Maria Teresait와 1817년에 결혼했다. 마리아 테레사는 토스카나 대공 페르디난도 3세와 나폴리 시칠리아 공주 루이사의 막내딸이었다. 두 사람 사이에는 다음 자녀들이 있었다.
이름 | 출생 | 사망 | 비고 |
---|---|---|---|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 | 1820년 | 1878년 | 합스부르크로트링겐 가의 아델라이데와 결혼 |
사보이아의 페르디난도 | 1822년 | 1855년 | 제노바 공; 베틴 가의 작센의 엘리자베트와 결혼 |
사보이아의 마리아 크리스티나 | 1826년 7월 2일 | 1827년 7월 15일 | 요절 |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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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 wrote to Francis IV of Modena in November 1833, "I am tired of the state of anxiety that "Young Italy" keeps me in, with its repeated threats of invasion, doubting that there is anything its members won't do... given that the Great Powers have decided not to eliminate the evil at the root, I ordered a secure agent, about six weeks ago, to encourage the heads of "Young Italy" to organize a movement against me, letting them think that a major in the Fenestrelle Fort shared their views. Then they arrived there in great numbers with Ramorino, Mazzini, [Carlo] Bianco [di Saint Jorioz], and their other major leaders: ... the possibility of going there myself with considerable forces in a few hours, induces me to attempt this trick in order to capture their major lead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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